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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이라는 이름의 사랑 (KEEC) 글쓴이 : KEEC   2012-08-27 11:28

신성이라는 이름의 사랑 ♡

우리가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은 서로에 대한 끌림입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끌림은 서로에 대한 밀어냄을 동반합니다.
끌림과 밀어냄의 메커니즘을 이해 하는 데는 지구의 이원성과
양극성을 이해 해야 합니다.

흔히, “필링이 왔다.” “ 강렬한 끌림이 왔다” 그래서
“사랑에 빠졌다” 라고 합니다.
이런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엄청난 착각입니다.

사랑은 불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하는 전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어느날 갑자기 생겼다가 그 다음 날 갑자기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그럼,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이란 어떤 생각이나 행동에 국한 되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자신을 통하여 자신의 주변에 일어나도록 허용된
에너지 입니다.

사람의 원래의 본성은 신성한 사랑 입니다.
하나의 육신이 다른 육신을 보살피는 것을 사랑으로 생각 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이란 그렇게 제한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근원적으로 부여 받은 본연의 자질 입니다.
사랑으로부터 모든 존재는 창조 됩니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사랑할 때가 있으면 사랑이 식을 때도 있다고
얘기하는 것은 잘못 입니다. 이렇게 왔다가 사라지는 사랑은 자신의
에고에 근거를 둔 감정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다는 느낌을 가진 사랑을 하다가도, 자신에게 무엇인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사랑이 식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서로 기대감 속에 매달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영원한 사랑은 생겨났다가 상황에 따라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변함없이 늘 있는 것,
알아보기 쉬운 것,
숨기지 않는 것,
간단한 것,
서로 믿는 것,
어린아이같이 순수한것,
모든것을 아는 통찰력,
이런 것이 바로 참사랑 입니다.

사랑은 처음부터 완전한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들도 신성이라는 사랑을 알때,
그때 비로소 완성, 자아실현(수퍼에고)의 고지에 다다른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으로 빛나십시요.* 진주 총총..
누군가 그대를 모욕하거든 (KEEC) 글쓴이 : KEEC   2012-08-27 11:27

구르지예프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의 할아버지의 죽음이 그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고.
구르지예프가 아홉살 때, 그의 할아버지는 어린 구르지예프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난한 사람이라 너에게 남겨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하지만 꼭 한 가지,
내가 너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이후로 내가 항상 보물처럼 간직해왔던 것이 란다.
비록 너는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기억하도록 해라.
언젠가 내 말을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잊지 말고 기억하거라.
지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잊지 않고 기억할 수만 있다면 그 의미를 이해할
날이 꼭 올 테니까 말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구르지예프에게 한 말은 이랬다.
“만일 누군가 너를 모욕하거든, 24시간이 지난 후에 그에게 맞서도록 해라!”
24시간 후에 맞서라고? 24시간이 지나고 나면 분노는 더 이상 분노로 남아있을 수 없다.
분노는 즉각적인 분출을 요구한다. 하물며 모욕을 당한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24시간을 기다리라니?

“누가 너를 모욕하거든 혹은 너를 화나게 만들거든,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해라.
‘내일 다시 오겠다. 나는 24시간이 지난 다음에 비로소 대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할아버지가 임종하는 자리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미 한 약속을 깰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일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겠다.”
당연히 모욕을 준 사람은 이 돌발적인 상황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구르지예프는 이 상황을 두고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상황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게 된다.

모욕을 한 남자가 옳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다시 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당신은 내가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혹은 그 사람의 말이 전혀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그의 말이 전적으로 틀렸다면, 그 말에
신경을 쓸 까닭이 무엇인가?
그의 말이 상처가 되었다면, 낱말 속에 감춰진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상처가 될 이유가 무엇인가 말이다.

이처럼 구르지예프는 같은 방식을 분노뿐만 아니라 다른 감정을 다루는 데도 활용했다.
그때마다 감정은 사라져버렸다!
구르지예프는 붓다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고지에 도달한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 놀라운 여정은 아주 작은 발걸음에서 시작되었다.
죽음을 맞고 있는 할아버지와의 약속. 그 약속이 그의 전 생애를 바꿔놓았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윤운성) 글쓴이 : KEEC   2012-08-27 11:26
“지금 여기의 진실 외면한채 허상과 욕망 좇고 있지 않은가”






한국 불교·승단 비판 '‥부처를 죽여라' 낸 도법스님
1일 전북 남원 지리산 자락. 3월부터 바랑 하나 메고 지리산과 제주도, 부산을 거쳐 경남에서 메말라가는 ‘생명평화’를 길러내고 있는 탁발순례자 도법 스님이 잠시 거처인 실상사에 돌아와 한국 불교를 향해 죽비를 내려쳤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아름다운 인연 펴냄). 그는 한국 불교와 승단에 던지는 절절한 신앙고백서를 냈다. 1990년대 초 청정불교운동을 위한 불교결사체인 선우도량을 결성해 ‘제대로 된 불교란 무엇인가’를 탐구해 온 결과물이다.

“냉정하게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버리며 살고 있는가. 맛있는 음식, 편리한 생활, 감각적인 즐거움 등 탐욕에 자신을 맡겨 놓고 있지는 않은가.”

스님들을 향한 그의 일갈엔 타협이 없다. 스스로 ‘막가파’라고 한다.

“붓다 당시의 불교를 공부하면 할수록 현재 승단이 불교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바로 지금 여기의 구체적 삶 속에서 진리를 구현하도록 했지만, 한국 불교에선 내면의 무엇이나 근본 뿌리를 찾아야만 하는 것으로 여기고 끊임없이 거기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붓다가 향락과 고행을 스스로 버리고 택한 중도는 정약용 선생의 ‘실사구시’와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지금 여기’를 도외시한 채 허상과 욕망만을 쫓는 관념에 대한 일갈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다.

실상사에서 주지의 ‘권위’를 벗고, 붓다의 삶에 다가서기 위해 농장과 귀농학교, 작은 학교를 꾸리고 모든 구성원들과 함께 매사를 논의하는 사부대중 공동체를 가꾼 실천가이기에 그의 말이 공허할 수 없다.

도법 스님은 승단만이 아니라 탁발 순례중에도 답답함이 밀려든다고 했다.

“온갖 계층들이 경제타령뿐이다. 가난한 사람만이 아니다. ‘저 정도면 쓰는 게 넘쳐난다’고 싶은 사람들조차 ‘부족해서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오직 부자 되고, 경쟁에 이기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는 환상 속에 매몰돼 가는 현실에도 그는 가차없이 죽비를 친다. 허상을 벗고 실상을 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