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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족사진
  • 작성일 : 2013-07-14
  • 작성자 : 장병길
  • 조회수 : 880
작성일 2013-07-14 작성자 장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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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진 - 이민하(1967~ ) 엄마는 밤새 빨래를 하고 할머니는 빨래를 널고 아버지는 빨래를 걷고 나는 옷들을 접고 펴고 동생은 입는다 덜 마른 교복 날이 새도록 세탁기가 돌아도 벽에 고인 빗물은 탈수되지 않고 멍이든 두 귀를 검은 유리창에 쿵쿵 박으며 나는 계절의 구구단을 외고 동생은 세 살배기 아들과 기억의 퍼즐을 맞추고 할머니는 그만해라 그만해라 욕실을 들여다보시고 엄마는 죽어서도 빨래를 하고 팔다리가 엉킨 우리들은 마르지도 않는 지하 빨랫줄에 널려 아버지는 나를 걷고 나는 동생을 접고 펴고 동생은 입는다 덜 마른 아버지 *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세탁기 돌리는 법을 모르셨다. 할머니에게 빨래란 손으로 비비는 것, 발로 밟는 것, 방망이로 두드리는 것, 푹푹 삶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 빨래는 하늘을 하얗게 바꾸어주는 앞마당의 요술, 지저분한 세상의 얼룩을 없애주는 신비, 차곡차곡 쌓아올린 푹신하고 향기로운 쿠션, 마루에서 차고 다녀도 괜찮은 앙증맞은 장난감 공이었다. 나는 그저 숨바꼭질로 하얀 하늘을 대지라는 척박한 현실로 끌어내리거나 세상에는 얼룩과 때가 끊이지 않는다는 진리를 증명해 보였을 뿐이었다. 쌓아올린 것은 당연히 무너진다는 인과율을 실험하면서 아무리 푹신한 것도 가해진 충격과 세기에 따라 무언가를 깨트릴 수 있다는 예외의 법칙을 찾으면서. 빨래라는 노동이 할머니에서 어머니에게로 계승되어야 비로소 가문이 유지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구구단을 외지 못하는 나를 할머니가 마냥 귀엽다 하실 때 어머니와 아버지는 학교에서 열심히 구구단을 가르치고 계셨다.  ― 조재룡·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