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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 창설자 테드 터너의 꿈과 도전(KEEC) 글쓴이 : KEEC   2012-08-27 13:13

CNN 창설자 테드 터너의 꿈과 도전

데일 밴 애타

지나친 공적 활동 때문에 "남부의 대변인"이라는 빈정거림까지 받는 테드 터너는 흔히 크게 과소평가되고 있다.

무모해 보이는 겉모습을 한 꺼풀 벗겨보면 그는 텔레비전 산업을 변모시킨 빈틈없는 개척자이며 몽상가이기도 하다. 그는 CNN을 통해 전세계에 뉴스를 전하는 통로를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사건 자체를 만들어내는 강력한 힘을 창조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그 정도로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터너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귾임없이 개혁함으로써 다른 사람들 같으면 여러 세기가 걸렸을 업적을 이룩했다.

미우나 고우나 그는 전형적인 미국인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나이

순재산 48억 달러로 미국에서 26번째 부자이면서도 그는 자기 차(포드사의 토러스)를 스스로 운전하고 집에서는 에어컨을 틀지 않으며 회전문 밑에 떨어진 동전을 줍다가 다칠 뻔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남부의 엄격한 사립학교를 거쳤고 알렉산더대왕을 떠받드는 그는 전쟁중에 북베트남을 위해 선전방송을 했던 여배우 제인 폰다를 세 번째 아내로 맞았는데 두 사람은 지금도 죽이 잘 맞고 있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자기는 "뉴스를 증오"하며, 뉴스는 사람들을 기분나쁘게 만드는 "악"이라고 공언했었다. 그런 그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TV 뉴스채널인 CNN(케이블 뉴스 네트워크)을 창설했으며, 지금은 세계 최대의 언론기업인 타임워너의 부회장으로 있다.

그는 운동신경이 둔해 고등학교 시절에 운동을 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요트경주에서 아메리카스 컵을 차지해서 유명해졌고, 프로야구팀을 매입하여 1995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현재 NBA(미국의 전국농구협회=편집자 주) 소속 농구팀과 월드 챔피언십 레슬링 기구를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신설 NHL 하키팀도 소유하고 있다.

그는 "군가"인 미국 국가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주 세계평화를 역설하고 있다-그가 유엔에 10억 달러를 희사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독교를 "패배자들의 종교"라고 생각하며 그의 CNN은 폭력사태나 전쟁이 터질 때마다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본명이 로버트 에드워드 터너 3세인 그는 모순 덩어리이다. 진짜 남부연방군 기병대 칼을 휘두르며 사무실 안을 왔다갔다하기도 하는 이 활동적인 미디어황제는 움직이는 사나이이다. 그에게는 따분한 것이 가장 큰 죄악이다.

인터뷰 도중에 그가 비서에게 최근에 자기가 어느 대학에서 받은 표창장을 가져오라고 이른다. 그는 손님에게 그 표창장을 읽어보라고 한다. 손님이 표창장의 구절을 암송하듯 읽는다. "오늘 본 대학은 귀하를 사업가, 요트맨, 환경운동가, 목장주 및 자선가로 성공하게 만들어준 비전과 모험심 그리고 결단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 정도면 됐어요." 그가 벽에 걸린 수많은 상장과 표창장들을 눈여겨보며 말한다. 그 밖에도 수십 개의 요트경기 트로피, 월드시리즈 다이아몬드 반지 등 엄청난 업적을 이룬 일생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있다. 방문객의 요청에 따라 얼른 컴퓨터를 두드려 보더니 그는 자기 소유의 주식값이 지난 한 시간 동안 0.25포인트 올라 자기 재산이 60분 전보다 1250만 달러 더 많아졌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자기가 성공을 거둔 직업들을 열거한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요트맨이었소. 나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기업인이 될겁니다. 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환경운동가가 될겁니다.

"나는 개인이 한 평생에 이룩하는 업적에서 사상 최고기록을 수립할 작정입니다. 그렇게 해서 알렉산더대왕, 나폴레옹, 간디, 예수, 모하메드, 부처, 워싱턴, 르스벨트, 처칠과 견줄 만한 훌륭한 인물이 될겁니다."

이게 진담일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분명히 진담이라고 말한다.

그의 아내 제인은 자기 남편의 추진력이 어디서 오는가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이는 성공에 만족하는 법이 절대로 없어요. 무슨 일이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법도 없어요. 절대로 자신의 성공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거예요."

"테드는 대단한 자아의 소유자입니다."

그의 친구로서 터너방송국의 부사장을 역임한 바 있는 유 에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로버느 우슬러의 말이다. 지금 커너가 가장 바라는 것은 노벨평화상이다.



아버지의 가르침

테드 터너는 지금은 세계를 구하고자 애쓸지 몰라도, 어려웠던 어린 시적부터 거의 평생을 자신을 구하고자 애쓰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의 어린 시적에 가장 중요했던 인물은 전제적인 아버지 에드 터너였다.

터너 일가는 미시시피주에서 면화를 재배하는 농민이었는데 테드(1938년생)가 태어나기 전에 재산을 처분하고 신시내티로 이사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자동차를 판매하다가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아내와 테드의 여동생 메리 진을 미국 본토의 여러 근무지로 데리고 다녔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세 살 난 테드만은 시시내티의 할머니에게 맡겼다. 여섯 살때 테드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보내졌다. 그가 무관심 속에 방치된 다른 아이들처럼 아버지의 관심을 끌려고 애쓴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말썽을 일으켰다.

테드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새로 시작한 옥외광고 사업을 조지아주의 서배너에 가서 하기로 결정했다. 테드도 남쪽으로 옮겨갔다-애틀랜타에 있는 조지아군사학교(군대식 훈련을 중시하는 사립학교=편집자주)에 입학했던 것이다. 제멋대로 구는 남학생들을 엄하게 다스리기로 유명한 학교였다.

늘 "양키자식"이라고 따돌림을 당하고 놀림감이 되면서도 테드 터너는 기가 꺾이지 않았다. 실제로 이 4학년 학생은 자기보다 모두 나이가 많은 기숙사 친구들에게 자기 소개를 하면서 누구든지 나서는 사람은 모두 패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뭇매를 맞으면서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매맞는데 이골이 나 있었다. 아버지는 이틀마다 새 책을 한 권씩 읽으라는 지시를 어겼다는 따위의 이유로 종종 철사로 만든 옷걸이 같은 것으로 그를 때렸던 것이다. 테드가 울기라도 하면 벌은 더 심해졌다.

한번은 자식을 때리는 부모의 마음이 더 아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에드 터너는 아들에게 옷걸이를 넘겨주면서 아버지를 때리라고 했다. 테드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여러 해 후 그는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난 감격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열한 살때 그는 테네시주 채터누가에 있는 다른 군사학교인 매콜리학교로 전학갔다. 십대 시절의 테드는 여름이면 집에 와서 아버지를 도와 옥외광고판을 설치했다. 그는 집에서 지내도록 허락받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테드가 받을 봉급에서 방세를 꼬박꼬박 받아냈다.

테드가 매콜리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그의 집안에 첫번째 비극이 닥쳤다. 그의 누이동생 메리 진이 루푸스에 걸렸던 것이다. 누이동생은 5년 동안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하면서 가끔 집안에 악몽같은 소동을 일으켰다. 누이동생은 "아이고, 나 좀 죽게 해줘! 나를 죽게 해줘!" 하고 애원했다.

마침내 누이동생이 열다섯의 나이에 사망하자 아버지 에드 터너는 비탄에 빠졌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은 기적을 이루기 위해 신비로운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하고 슬픔에 빠진 아버지를 위로했다. 그러자 에드는 "하느님이 그런 식이라면 난 필요없고" 하고 폭언을 퍼부었다. 그는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았고, 그래서 어린 테드도 신앙을 버리게 되었다.

결국 테드는 나쁜 아이 노릇을 하기에 싫증이 났다. "그래서 나는 착한 아이가 되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가 회상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테드가 매콜리에서 모범생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학교에서 벌점 기록을 깨뜨렸지만, 그래도 주(州) 토론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여러가지 상도 받았다.

군사학교를 마친후 테드는 로드아일랜드에 있는 아이비리그 대학인 브라운대학교에 진학하여 아버지를 흐믓하게 했다. 그러나 에드가 자기 이름을 물려받은 아들이 경영학 대신 고전을 공부할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테드는 고대사에 나오는 영웅들에게 병적인 애착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에드는 아들을 질책하는 장황한 편지를 썼다. 에드는 서두에 "네가 고전학을 전공으로 택했다니 어이가 없고 소름이 끼치기까지 한다"고 썼다. 그는 고전을 공부하면 테드가 "고립된 일부 비현실적 몽상가들이나 선택된 대학교수 집단"과 어울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디.

그는 아들에게 "내가 보기에 너는 빠른 속도로 멍청이가 되어가고 있다. 네가 그 더러운 환경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기를 바란다"고 쓴 다음 이렇게 끝맺었다. "너는 지금 속물들에게 맡겨져 있는데, 따져보면 너를 그런 곳에 보낸 것은 나다. 미안하다, 아비."

테드의 반응은 그 자체가 고전적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편지를 전교생이 읽도록 대학신문에 실었다. 에드 터너는 누군가가 보내준 그 신문을 읽고 배신감을 느꼈다.

결국 테드는 전공을 경영학으로 바꿨다. 그러나 그는 경영학 학위를 따지 않았고 다른 어떤 공부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학시절을 파티를 벌이며 보냈다. 그의 공범자이며 나중에 옥외공고로 백만장자가 된 동료 피터 데임스는 당시늘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 둘은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브라운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남들보다 잘하는 일을 찾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마침내 흥청망청 술잔치를 벌이기로 한겁니다."

테드는 2학년때 인근 대학의 여학생 기숙사에서 소동을 벌여 정학처분을 받았다. 3학년때 학칙을 어기고 자기 기숙사에 여학생을 데리고 들어가 두번째로 정학을 당한 테드는 다시는 복학하지 않았다.

그는 데임스와 함께 마이애미로 도망갔으나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으므로 가난한 쿠바인 사회에서 부랑자 생활을 했다. 집에 돌아가 아버지에게 굴복하지는 않겠다고 마음먹은 터너는 연안경비대 예비함대의 "여름 순항"에 참가하기로 했다. 수습생 터너는 포트로더데일에서 연안경비대의 태비스호를 타고 유카탄반도로 향했다. 그는 거의 자학적인 근면으로 상관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함장은 그를 연안 경비대 사관학교에 추천해 주겠다고 제의했다.

터너는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순항중에 그는 아버지에게 가서 옥외광고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전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곳에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가 함장에게 말했다.

터너광고회사의 최우수 세일즈맨으로 꼽히던 허드슨 에드워즈가 이 젊은이를 6개월 동안 훈련시겼다. "테드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세일즈맨이었지요. 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사람은 닮은 데가 너무 많아서 한 방에 있으면 10분을 가만히 못 넘기고 서로 소리를 지르며 이런저런 일을 하는 최선의 방법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하지만 둘 다 방울뱀이라도 홀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에드워즈의 말이다.

아버지 에드는 자기 아들이 회사의 최우수 세일즈맨들을 빠른 속도로 따라잡는 것을 흐믓하게 지켜보다가 그에게 조지아주 메이컨영업소 소장 자리를 주었다. 그러나 1963년에 테드는 아버지가 사업의 지나친 확장을 우려하여 회사를 팔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테드는 아버지가 "포기했다"고 비난했다.

자수성가한 백만장자 에드는 사실은 신경쇠약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3월의 어는 상쾌한 아침에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뷰퍼트카운티에 있는 자기 농장에서 아침을 들고나서 요리사를 칭찬한 후 휘파람을 불며 주(主)침실로 올라가 욕실에 들어가서 38구경 연발권총을 자기 오른쪽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 자살했다.

귀 환

테드 터너는 그 자살사건을 자기 인생의 밑바닥이라고 불렀다 부자관계가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그는 아버지가 자기를 매우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테드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늘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우리는 정말 친했어요. 아버지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아버지는 나의 첫 번때 결혼식때 들러리를 서주셨습니다. 가끔 나를 미치게 만들기는 했지만 나는 아버지를 정말 좋아했어요."

그는 아버지가 야릇한 방법으로 사랑과 속마음을 나타냈음을 깨닫게 되었다. 에드는 테드의 첫 번째 아내에게 자기가 아들을 의도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든 것은 "불안정이 위대함을 낳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테드도 그런 아버지가 옳았다고 말한다. "오늘날 무슨 일에 서건 정상에 오르려면 정말 초인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어디서건 초인적 업적을 이룬 사람치고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불안감이 계기가 되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에드 터너는 자살은 그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애쓰도록 만들었다. 어는 친구의 말처럼 그의 아버지는 「햄릿」에 나오는 유령처럼 "늘 아들에게 은밀히 말하는 무대 뒤의 목소리" 같은 존재였다.

테드 터너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애도할 시간이 별로 없다고 판단했다. 24세의 대학 중퇴자인 그는 당장 아버지가 자살하기 전에 체결한 계약을 파기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슬펐고, 진저리가 났고, 굳게 결심했다."

매입자가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자 터너는 회사의 옥외광고판이 있는 곳마다 자신의 광고판을 세우는 방법으로 회사를 파산시키겠다고 협박했다. 매입자는 결국 회사를 되팔기로 동의했다.

살벌한 경쟁세계에서 터너광고회사를 되살리기 위한 테드의 노력은 경탄할 만했다. 얼마 후 그는 회사가 다달이 수익을 늘려가도록 만들었다. "어려움에 처한 회사를 구한 데서 처음으로 그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초기의 동업자였던 제임스 로디의 말이다. "그는 직원들을 몰아대며 필사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때가 그의 절정기였을겁니다.

오래지 않아 그는 옥외광고사업에 싫증이 났다. 1970년에 테드는 침체 상태에 빠진 UHF파 채널 17의 애틀랜타 TV방송국이 파산지경에 이르러 매물로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 "모두들 내가 무일푼이 될것이라고 했지요. 나는 TV사업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거든요. " 어쨌든 그는 터너광고회사 주식 250만 달러로 이 회사를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회사 이름을 터너커뮤니케이션그룹(WTCG)이라고 바꾸고 비어있는 옥외 광고판들에다가 채널 17을 광고하기 시작했다. 그는 TV 방송업계 최초의 몇몇 성공적인 "카운터프로그래밍"(다른 방송국의 프로에 대항하기 위한 대항 프로편성=편집자주)을 시작했다. 3개 가맹계열 방송국(방송네트워크 회사나 프로그램 공급업체로부터 프로그램을 받는 방송국 또는 케이블 TV국=편집자주)들이 종교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일요일 아침이면 그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아카데미상 극장"을 내보냈다. 그는 자기가 직접 이 프로의 사회를 맡았다. 그리고 가맹계열 방송국이 계약에 묶여 네트워크 뉴스를 방송해야 하는 초저녁 뉴스시간이면 터너는 "스타트랙"을 재방영함으로써 뉴스를 좋아하지 않는 시청자들을 끌어들였다.

그것은 단순한 사업전략만은 아니었다. 그는 뉴스 프로그램을 싫어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공언하곤 했다. "난 뉴스가 싫어. 뉴스는 악이야. 사람들을 기분나쁘게 만들거든. 난 뉴스 같은 건 다루기 싫어." 연방통신위원회(FCC)가 매주 7시간씩 뉴스를 방영하도록 요구했다는 말을 듣고 그는 뉴스시간을 새벽3시로 돌려 이에 응수했다.

취재기자도 두지 않았다. 뉴스는 통신사나 신문사에서 뉴스를 직접 받아 읽는 식이었다. 터너는 방송국의 아나운서 빌터시에게 "앵커" 역할을 맡기고 재미있게 즐기라고 일렀다. 터시는 실제로 종이봉지를 머리 위에 매달고 뉴스를 보도하거나 고릴라 차림을 하고 게릴라 공격에 관한 기사를 읽는 등 갈수록 엉뚱한 짓을 했다. 어느 날 아침 터시는 자기 개의 입 언저리에 땅콩버터를 잔뜩 발라놓고 카메라의 초점을 개가 버터를 핥아먹는 모습에 맞춰 마치 말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 후 윌터 크롱카이트(미국의 대표적인 방송 저널리스트, 81년까지 CBS의 주요 뉴스 프로그램을 담당하다가 은퇴했음=편집자주)의 녹음 테이프를 틀었다. 그렇게 하자 마치 개가 "뉴스를 전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터너는 3년 만에 방송국이 흑자를 내도록 만들었다. "길리건의 섬"이나 "비버에게 맡겨라" 그리고 옛 흑백영화의 재방영이 값싼 프로그램 편성 재료가 되었다. 그러나 터너는 본격적인 성장을 하려면 원작 프로그램 편성 재료가 되었다. 그러나 터너는 본격적인 성장을 하려면 원작 프로그램을 내보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스포츠가 그 적당한 후보감으로 떠올랐다.

그의 첫 번째 성공작은 레슬링 프로였다. 그는 조그만 방송국 본사 건물 안에 실제 규격의 링을 만들어놓고 프로레슬링 시합을 생중계로 방영했다. 그러자 시청률이 올라갔다. 그러나 터너가 스포츠사업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공은 프로야구팀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경기 중계권을 따낸 것이었다. 브레이브스팀은 열렬한 팬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터너는 곧 이들에게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그는 1976년 아예 그 팀을 사들였다.

그런 다음 그는 그의 성공을 마무리짓는 일대 모험을 감행했다.

슈퍼 방송국

그동안 터너는 자기 방송국의 취약한 UHF 시그널을 보강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는데 그 하나가 농촌지역에 마이크로파 중계탑을 세우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케이블 TV"라고 불렀다. 가입자들이 중계탑에서 자기들 집까지 케이블을 연결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원시적이고 성가신 방법이었다.

터너는 1976년에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해결책을 생각해냈다. RCA 인공위성이 그 해결책이었다. 그는 인공위성이 우주공간으로부터 그 전자적 영향이 미치는 지구상의 어느 지역으로든지 TV 시그널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는 인공위성 시그널을 케이블 TV 업체들로 보낼 가능성에 눈을 뜬 업체는 타임 주식회사 소유인 홈 박스 오피스(HBO, 마국 최대의 케이블 프로그램 공급업체=편집자주)뿐이었다. 터너는 자기 회사가 인공위성을 통해 프로그램을 배급하는 두 번째 업체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시그널을 받으려면 75만 달러짜리 "지구국"과 FCC(연방통신위원회)의 허가가 필요했다. 그는 이 두 가지 요건을 다 충족시켰고 WTBS(터너 방송 시스템)라고 개명한 그의 회사는 1976년 12월에 마침내 위성방송을 시작했다. 나중에 이 회사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슈퍼방송국"이라는 모토를 내세웠다.

처음에는 성장이 느렸다. 케이블 업계 자체가 막 기지개를 시작한 때였기 때문이다. 원래의 가입자는 불과 1만 가구였으나 테드에게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그의 별볼일 없던 UHF 방송국이-전에는 날씨가 좋아야 불과 72km를 커버할 수 있었다-이제는 워싱턴주의 후미진 마을까지 전파를 보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몇가지 놀라운 결과 때문에 그의 방송국이 유명해졌다. 예를 들어, 알래스카의 놈에 사는 주부들까지도 케이블 방송으로 줄곧 브레이브스팀의 경기를 시청하여 이제는 출전 선수들의 이름을 댈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브레이브스팀은 "미국팀"으로 불리게 되었다.

브레이브스팀의 소유주인 터너는 이 팀의 가장 열렬한 팬이었다.터너는 관중과 함께 미국국가를 불렀고 심판에게 고함을 질렀으며 또 담배를 질겅거리고 선수들처럼 침을 뱉었다.

그는 자기 소유의 팀이 자주 이기지 못할 재미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관중 앞에 나섰다. 그는 타조를 타고 구장에 들어갔고 볼걸들을 쫓아다니며 구장을 돌았으며 스스로 배트보이(야구팀의 잡일을 보는 소년=편집자주) 노릇을 하기도 했다.

테드 터너는 야구를 훌륭한 오락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마침내 그가 국제 경기에서 우승까지 한 요트 취미에 지장을 주기에 이르렀다.

그의 요트 취미는 어린 시절에 터너 집안이 당초 요트 승무원으로 고용했던 조지아주 출신의 흑인 지미 브라운과 함께 시작되었다. 브라운은 집안의 팔방미인격으로 운전사, 가정 관리인 그리고 결국은 테드의 대리 아버지 노릇까지 했다.

테드에게 사냥과 낚시 그리고 항해술을 가르쳐준 사람도 브라운이었다. "처음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잘 달래야만 했죠." 브라운의 회상이다. "나는 '테드도련님, 탐험하러 갑시다'하고 말하곤 했지요. 우리는 여러 섬을 돌아나니며 낚시도 하고 사냥도 했답니다. 테드가 항해를 시작한 건 그런 섬들에 가기 위해서였지요."

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가장 권장하는 스포츠였기 때문에 테드는 여름방학이면 서배너 요트클럽의 청소년부 경기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기는 경우가 드물었고 또 매우 무모했기 때문에 그의 배는 물 위에 떠 있을 때보다 물 속에 잠겨 있을 때가 더 많았다. 그는 이런 무모한 스타일 때문에 "뒤집어지는 아이"라든가 "턴오버(전복) 터너"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터너는 이 스포츠에 새로운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1970그는 요트를 구입하거나 수리하고 승무원들을 고용하고 레이스에 참가하는 등 국제 순회경기에 매년 약 10만 달러씩 지출했다.

요트계에서 터너와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그는 명문 귀족 출신들보다 훨씬 더 이 스포츠에 열심이었다. 그는 명성 높은 큰 국제경기인 서던 오션 레이싱 서키트(SORC)에서 전통을 뒤집고 우승했다. 승무원인 테리 맥거크는 이렇게 설명한다. "테드가 SORC에 참가했을 때 다른 선수들도 낮에는 열심히 항해했습니다. 하지만 밤이 되면 모두들 말하자면, 연안항해를 했지요. 테드는 밤에도 항해를 계속한 첫번째 선수로 꼽힙니다."

그가 첫 번째 아내 주디 나이를 만난 것도 요트를 통해서였다. 그 여자는 요트 챔피언의 딸이면서도 본인도 재능있는 향해가였다. 두 사람이 만난 후 터너는 그 여자에게 자기 배에 승무원으로 탑승해 함께 경기에 참가하자고 제의했고 결국 두사람을 우승했다. 그것은 터너가 큰 대회에서 따낸 첫 번째 우승이었다.

승리로 의기양양해진 21세의 두 남녀는 결혼을 했다. 4년 동안 두 자녀를 낳은 후 그들은 이혼했다. 주디는 애틀랜타의 어느 요트대회 도중에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끝났다고 느꼈다. 두 사람은 그때 서로 경쟁을 벌였다. 주디가 줄곧 앞서가자 경쟁심이 강한 테드가 주디의 배에 충돌했고 그 때문에 주디는 결국 우승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아내 제인 스미스와의 결혼 생활은 24년 동안 계속되었지만 이 역시 별로 순탄하지 못했다. 청년 공화당원 모임에 참석했을 때 테드는 앨라배마주 버밍햄의 명문 집안 출신인 금발의 스튜어디스에게 반했다. 제인은 테드의 어린 두 자녀 로라와 테드를 맡아 키우면서 세 자녀-레트, 보 그리고 제니-를 더 낳았다.(터너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몹시 좋아해서 레트는 레트 버틀러에서, 보는 남부연방군의 보르가드장군에서 이름을 땄다. 그러나 스칼렛이라는 이름을 제인이 극구 반대하여 막내딸의 이름은 제니라고 지었다.)

테드는 요트경기에 계속 집착한 나머지 한번에 여러 달씩 집을 떠나 있게 되었다. 그가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제인은 일요일 아침에는 아이들을 텔레비젼 앞에 모아놓고 테드가 진행하는 "아카데미상 극장"프로를 통해 아빠를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테드가 늘 자기 입장을 아주 분명히 해두고 있었기 때문에 제인은 뜻밖의 일이 생겨도 불평할 수 없었다. 한 친구는 터너가 시합에 참가하기 위해 집 밖으로 걸어나가면서 자기 아내에게 고함치던 때를 회상한다. 그때 터너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말했잖아? 사업이 첫째라고. 요트는 둘째이고 당신은 셋째야."

테드의 가장 큰 꿈은 요트경기의 슈퍼 볼 격인 아메리카스컵 레이스에서 우승하는 것이었다. 터너는 1974년에 이 레이스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1977년에도 실패한 터너는 더욱더 우승의 꿈을 키웠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승하자면 레이스를 앞두고 승무원들과 함께 여름을 지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브레이브스팀에도 충실하여 이 팀이 출전하는 경기도 꼬박꼬박 참관해야 했다.

그는 이 문제를 그 당시의 터너만의 할 수 있는 기상천회의 톱뉴스감 행동으로 해결했다. 야구팀 최고 책임자인 보위 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로스앤젤레스의 구단주 회의 도중에 터너는 힐튼호텔 수위 데스크 위로 뛰어올라 가서 "보위 쿤이 나를 죽이려 한다!"고 소리쳤다. 그는 또 어떤 기자에게 자기가 총을 입수해서 보위 쿤을 먼저 죽일 작정이라고 말했다. 브레이브스팀의 홍보담당 보브 호프가 터너를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점잖게 행동하라고 애원했다. 터너가 물었다. "이만하면 쿤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것 같소?" 호프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터너는 미소를 지으며 얌전히 굴겠다고 약속했다.

이 작전이 맞아 떨어졌다. 터너가 다른 선수와 뒷거래를 하자 쿤은 마침내 그의 자격을 정지하고 1977년 시즌중에 경기장에 출장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이제 그는 마음놓고 아메리카스컵에 대비하여 연습할 수 있게 되었다. 요트 커레이저스호를 탄 터너는 완벽에 가까운 항해술로 도전자들을 모두 손쉽게 물리쳤다. 그가 "캡틴 커레이저스(용감한 선장)"라는 별면을 얻는 것은 바로 그때였다.

터너도 그 당시는 요트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사생활에 지장을 주던 때였다고 시인한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가진 인터뷰에서 그때 한 일이 후회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 터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20년 동안 함께 산 아내에게 큰 고통을 주었소. 나는 내 생각만 했지 아내 생각은 별로 못했었소."

제인은 남편 없는 집에서 사는 법을 익혔으나 그녀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은 미남인 남편이 순회경기를 따라 다니는 가슴 풍만한 여성 팬들을 피하려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1988년에 이혼했다. 이때 터너가 지급한 위자료 4000만 달러는 조지아주 역사상 가장 큰금액의 위자료였다.

묘한 것은 큰 대회들을 모두 석권한 터너가 1981년에 갑자기 요트를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그의 친구 로버트 우슬러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나한테 요트 경주를 좋아한다고 스무 번은 말했습니다. 그는 이기기를 좋아했을 뿐입니다."

세계의 바람

지미 브라운이 프롤리다주 텔러해시 근처에 있는 터너의 에벌론 농장의 부엌 식탁에 앉아서 터너가 요트경기에서-그리고 나아가 사업에서-성공을 거둔 비결을 이야기 한다. 70대 노인인 그는 경쾌한 사투리로 이렇게 설명한다. "그 양반은 남이 느끼지 못하는 바람을 감지할 수 있답니다. 그래서 갑판에 올라가서 로프를 이리저리 잡아당기는 겁니다." 이윽고 요트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른 요트들이 잠잠히 있을 동안 터너는 그들을 이리저리 헤치고 결승선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그건 타고난 재능입니다."

위험이 큰 사업 운영에서도 터너는 마찬가지로 바람이 어디에서부는지 감지하고 있다. 그것을 행운, 본능 또는 비전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지만 어쨌든 터너는 어떤 일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어도 앞서 나가 그 일을 해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케이블 뉴스 네트워크(CNN)이다.

슈퍼방송국을 출범시킨 터너는 위성기술을 이용할 또 다른 방법들을 찾았다. 그는 뉴스의 가능성에 착안했다. 테드 터너가 뉴스 전문 채널을 생각해낸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다. 타임 주식회사 등 다른 유력 기업들도 오래 전부터 이를 추진했지만 큰 돈을 들이고도 실패한 후로는 몸조심을 하고 있었다. 그때 터너가 바람을 감지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걸고 앞으로 나가 1980년에 CNN을 출범시켰던 것이다.

한때 뉴스를 조롱하던 사람이 왜 이 사업에 뛰어든 것일까? 공적으로는 그는 이 사업에 다음 번의 큰 모험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느린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늘 나는 사업가라기보다 모험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 일이 가능한지 한번 알아보기 위해 CNN을 시작한겁니다."

아마 더 깊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 그것은 생전에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해보고자 하는 꺼질 줄 모르는 욕구일지도 모른다. CNN 해설자인 로버트 노백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분은 자기가 최초의 슈퍼방송국으로 돈을 너무 많이 벌어 나라에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든 것이 CNN을 시작한 한 가지 이유라고 말했지요. CNN으로 큰돈을 벌 생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터너는 당초 CNN이 그저 뉴스를 그때 그때 신속히 보도하는 시시한(돈이 들기는 하지만) 사업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항상 방송을 세상 끝까지 내보내는 채널을 만들고자 했다. 1980년 6월 1일 저녁 그는 애틀랜타에서 300명의 내빈 앞에서 느긋하게 스위치를 켜면서 CNN이 "저널리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 될것이라고 선언했다.

3대 방송국(CBS, NBC 및 ABC=편집자주)은 그런 방송이 성공할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3대 방송국 중역들은 미국인들은 24시간 방송되는 뉴스에 별 관심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치킨 누들 네트워크"(Chicken Noodle Network, CNN을 빈정거리는 말=편집자주)가 참담한 실패로 끝날것이라고 예언했다.

역시 CNN은 초기에는 경험많은 뉴스팀이 없었기 때문에 실수가 많았다. 지금 터너방송국의 회장이며 최고경영자인 테리 맥거크는 이렇게 말한다. "당초 우리는 연간 운영 예산을 1200만 달러로 잡았습니다. 개국 일주일 후에 우리는 예산을 1800만 달러로 증액했고 30일 후에 다시 3000만 달러로 늘렸습니다. 결국 우리는 무려 2억 5000만 달러의 적자를 냈습니다."

그러나 터너와 그의 투지만만한 개척자들은 그대로 밀고나갔다. 맥거크는 이렇게 회상한다. "터너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 일이 위험이 없는 멋진 덩크슛이라고 확신했습니다." 1980년대에 CNN은 레이건 대통령 암살기도 사건과 샌프란시스코 지진 등을 즉각 보도하여 재정이 튼튼한 다른 방송국들을 여러 차례 앞질렀다. 시청률이 높아졌다.

CNN이 완전히 성장한 것은 1989년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후였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CNN이 1991년 쿠데타 기도를 보도함으로써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그를 억류한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에게 압력을 가해준 것을 높이 평가했다. 보리스 옐친 역시 CNN이 생중계로 그가 소련 군대에 도전하여 탱크 위에 올라탄 모습을 방영해 준 덕분에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CNN이 명성을 확고하게 굳힌 것은 1990년 "사막의 폭풍" 보도를 완전히 주도하면서부터였다. 「타임」지는 터너를 1991년의 인물로 선정했다.

CNN의 앵커로 일하는 동안 터너와 여러 가지 의견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테랑 기자 댄 쇼어도 "그가 뉴스사업을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외교 자체를 변화시켰다"는 점을 시인한다. 전에는 존 F. 케네디와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쿠바 미사일 위기를 둘러싸고 편지와 전보를 교환했었다. 지금은 일국의 국가원수가 CNN을 통해 생방송으로 요구사항을 제시하고, 상대편 국가원수가 다음 번 뉴스시간 전에 이에 응답하기만 하면 된다.

애틀랜타에 본사를 둔 CNN은 유례없는 전세계적 텔레비젼 뉴스방송국이다. 18년 전 처음 방송을 개시했을 때 CNN의 가입자수는 170만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8000만 세대에 달한다. CNN은 도합 32개 지국-국내 9, 해외 23-을 두고 있으며 600여 국내외 계열사들이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있다.

그래도 테드 터너는 만족하지 않았다. 1986년에 그는 메트로-골드윈-메이어(MGM)사를 가격 흥정도 없이 13억 달러에 사들였다. 비판자들은 그가 너무 비싸게 샀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터너는 빚을 갚기 위해 즉시 MGM의 영화, TV 및 비디오 사업을 매각해야만 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큰 자산은 3300여 편의 옛 영화를 소장한 라이브러리뿐이었다.

터너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의 TBS 슈퍼방송국은 영화를 내보낼 때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게 되었고, 그는 또한 흑백영화들을 컬러화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나는 천연색이 마음에 들어. 우리는 사물을 천연색으로 보니까."

이 역시 사업의 천재다운 시도였다. 터너가 첫 번째로 컬러화한 12편의 영화는 신디케이트를 통한 일년간의 배급료로 편당 평균 90만 달려를 벌어들였다. 터너는 흑백영화와 컬러판을 모두 배급하여 수익을 배로 늘렸다. "카사블랑카"를 컬러화하는 데 대한 불만의 소리가 들리자 그는 당당하게 "나는 컬러화하고 싶었다. 그건 내 것이니까"라고 응수했다.

이제 MGM 매입이 횡재였음이 판명되고 있다. 터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고전들을 TBS와 새로 설립한 두 케이블 채널 TNT(터너 네트워크 텔레비전)와 TCM(터너 클래식 영화)을 통해 재방영하여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다. TNT는 자체적으로 "게티스버그" 같은 새 고전영화도 만들었는데, 이 영화에서 테드는 조연으로 특별출연하여 조지피켓 장군의 공격으로 피살되는 남군 장교의 역을 맡았다.

그러나 터너는 외부 지원 없이는 자본이 부족한 MGM 도박에서 회생할 수 없었다. 1987년에 그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기업가답지 않게 일단의 케이블 업체들이 터너방송국의 지배주주가 되도록 허용했다. 이로써 그는 운영권을 이사회에 넘겨주고 그 결정에 따르게 되었다. 이것은 터너 길들이기의 시작이었다.

정신적 반려자

그는 1980년대 중반에 애틀랜타의 정신과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조울병 진단을 내리고 그에게 리튬염을 처방했다. 그후 몇몇 사람들은 터너의 별난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고 했으나 터너 자신은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두어 해 리튬염을 복용했지만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한다. 다른 의사도 원래의 진단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터너에게 가장 좋은 처방은 여배우 겸 건강관리 기업가인 제인 폰다인 것으로 드러났다.

두 번째로 이혼한 후 터너는 어느 친구에게 자기를 대신하여 영화배우 세 명에게 접근하여 데이트를 신청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중 한명이 제인 폰다였다. 당시 좌파 정치운동가인 남편 톰 헤이든과 별거중이던 제인 폰다는 캘리포니아주 베벌리 힐스에서 열리는 모금을 위한 조찬모임에만 터너의 손님으로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 폰다는 정중했지만 그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터너 자신은 홀딱 반하고 말았다. 터너는 폰다에게서 미모와 힘 그리고 사랑 등 그가 바라던 모든 것을 발견했다. 그후로 폰다는 초청에 응하지 않았지만 터너는 기다렸다. 마침내 1990년에 두 사람이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폰다는 두사람이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놀랐다 - 부모의 자살로 충격을 받았다는 점도 같았다. 제인 폰다가 열두살이었을 때 제인의 어머니도 헨리 폰다와의 냉혹한 결혼생활에 낙담하여 자살했던 것이다. 터너와 폰다 모두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두사람 모두 두 번 결혼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타이밍도 딱 맞아떨어졌다. 두 사람이 데이트를 시작한 직후에 그는 "마침내 나타난 천생연분의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기 전에 행복하고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해보고 싶소. 그리고 이번에 나의 마지막 기회가 될거요."

폰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일이 매우 빨리 진행되었어요. 우리 두 사람은 모두 나름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보이려고 애썼기 때문에 서로의 관계를 성공시키는데 필요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두 사람은 1991년 크리스마스에 결혼했다. 많은 사람들이 터너가 제인 폰다에 안주하는 것을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CNN의 앵켜를 지낸 돈 파머는 감개무량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우익으로 행세하던 테드 터너가 '하노이 제인'이라 불리던 여자와 결합하니 재미있지 않습니까?"

"하노이 제인"이라는 별명는 1972년 7월 폰다의 북베트남 여행에서 유래한 별명이었다. 많은 베트남 참전 군인들은 지금도 폰다가 열차례나 라디오 하노이의 선전방송에 나와 미군 조종사와 장교들을 "전범"이라고 부른 것은 잘못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때의 경력이 되살아나 이들 부부를 괴롭히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가장 최근의 경우는 CNN이 미군이 베트남전중에 살인적인 신경가스 사린을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조사보고서를 내보냈다가 취소하여 매우 난처한 처지에 빠졌을 때였다. CNN의 사과는 방송국이 고용한 매스컴 담당 변호사 플로이드 에이브람스가 그 보도를 "지지받을 수 없는"보도라고 표현한 신랄한 보고서를 내놓은 직후에 나왔다. 그 변호사는 상반되는 증거는 묵살 또는 경시되었고 인터뷰는 왜곡되었다고 밝혔다.

터너는 그 방송에 대해 직접 사과하면서 이 사건을 "내가 겪은 가장 끔찍한 악몽"이라고 불렀다. 그는 사람들이 "용서하고 잊어주기"를 희망했다.

대체로 폰다와의 결합은 터너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폰다를 곁에 둔 터너는 이제 술을 마시지도 않고 담배를 피우거나 씹지도 않는다. 이제는 운동도 하고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파멸 가능성이 있는 사업상의 모험을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전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1996년에 거대 언론기업인 타임워너사가 자기 회사를 75억 7000만 달러에 완전히 매입하도록 허용했다.

이 거래에 따라 터너는 타임워너사의 부회장이 되었다. 일부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영향력 있는 제2인자로서 정열적으로 일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타임워너사의 회장 제럴드 레빈을 설득하여 종전의 터너방송 관련 업체들과 HBO 그리고 시네맥스를 감독하는 일을 자기에게 맡기도록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터너가 타임워너사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일인 원가 관리팀으로서의 활동이다. 그는 시범을 보이기 위해 터너방송의 중복되는 인원 700여 명을 정리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임워너사의 비대해진 종업원 규모를 더욱 줄이고 회사 전용 제트기와 같은 겉치레 장식물을 매각했다. 합병 정에는 부진하거나 하락세를 보였던 타임워너와 터너 방송의 주가는 모두 이 발표가 있은 지 2 년만에 거의 배로 올랐다.

정력적인 활동가인 테드 터너가 왜 제2이니자가 되기로 동의했을까? 가까운 친구들은 그가 합병없이는 회사가 성장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터너 방송의 중역 테리 맥거크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5년 전부터 장차 두어 개의 거대 미디어 업체가 업계를 지매하게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낙오되지 않으려 했던겁니다."

터너도 이 말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합병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줄곧 약자의 처지에 머무르는 데 싫증이 났습니다. 나도 이제 생애를 마감할 때가 가까워지니 잠시나마 강자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지는군요. 이건 그저 세상을 다른 위치에서 -지하실이 아니라 옥상에서-바라볼 기회를 갖는 것일 뿐입니다."

땅 부자

터너는 지금도 터너방송국의 지배자이며 타임워너사의 최대 주주로서 총주식의 약 11%인 5000만 주를 소유하고 있다. 게다가 MGM이 라는 돈줄을 쥐고 있기 때문에 터너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최근에는 땅을 사들이는 취미를 즐기고 있다.

그를 이 새로운 취미에 빠지게 만든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대공황기게 미시시피의 면화농장을 처분해야 했던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을 들 수 있다. 또 터너는 자신의 소원성취라는 즉면도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지미 브라운과 함께 어느 개인 소유의 섬을 무단침입했을 때 이런 소원을 밝혔었다. "난 언젠가는 다시는 남의 땅을 무단침입할 필요가 없을 만큼 넓은 땅을 소유할거야."

마지막으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따르면 땅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스카렛 오하라의 아버지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땅은 이 세상에서 얻기 위해 노력하고 이를 위해 죽을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란다. 오래 존속하는 것은 땅뿐이기 때문이야."

앞서 터너는 조지아주와 플로리다주 그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농장을 사들였고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앞바다에 있는 섬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또 애틀랜타에 있는 부동산과 CNN본사 건물의 옥상 주택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그가 1987년 서부의 매력에 끌리게 된 이후에 벌어진 사태에 비하면 한낱 장난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매입은 그가 "바 논"(몽땅, 전부'라는 뜻=편집자주)이라고 부르는 몬태나주 빅스카이 지역에 있는 2만 3000에이커의 땅을 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0년동안 1억 5000만 달러를 투자한 결과 지금 그는 목장만 해도 몬태나주에 네 곳, 뉴멕시코주에 세 곳, 네브래스카주에 두곳이 있고 아르헨티나의 안데스산맥에도 1만 1000에이커의 땅을 갖고 있어 총 개인소유 토지면적이 135만 에이커에 달한다. 현재 터너는 미국 최대의 개인 토지소유자이며 그의 땅 매입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어렸을 때 퍼즐놀이를 해본 적 있고?"그가 묻는다. "우선 귀퉁이를 마춘다음에 가장자리를 잇고, 그 다음에 안을 채우게 됩니다. 그래서 나도 그동안 미국 양쪽 해안지방에서, 그리고 캐나다와 국경을 접한 몬태나주와 멕시코와 접한 뉴멕시코주에서 토지를 사들인거지요. 이제부터는 안을 채울겁니다."

거부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아내와 함께 지내는 주된 거처는 몬태나주 보즈먼 근처의 플라잉 D 목장에 있는 놀랄 만큼 간소한 이층 통나무집이다. 이곳은 자연경관만은 뛰어나다. 집 앞에는 14에이커 넓이의 호수가 있고 눈 덮인 스패니시산 봉우리들이 보인다.

터너가 언덕을 깎아 산봉우리들의 모습이 자신의 호수에 완벽하게 비치도록 만든 후 경관은 더욱 좋아졌다. 그외에는 큰돈을 들여 헛간과 철조망, 울타리 같은 것들을 모두 철거했기 때문데 플라잉 D목장은 원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느 19세기 나무들을 되살리고 늑대, 곰, 방울뱀들이 자기 목장으로 되돌아오도록 하고 있다. 그는 환경보존단체들에 아낌없이 기부금을 내고 있으며, 플라잉 D 구역을 미국 서부지방 최대의 환경보존구역으로 만들어 앞으로 더 개발하지 못하도록 해놓고 있다.

그는 또 아메리카 들소들도 들여와 지금은 미국에서 들소를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다. 들소가 질병을 퍼뜨릴 것이라고 우려하는 그 고장 주민들에게 터너는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소들을 헐뜯는 말로 이에 응수했다. 그는 언젠가 "들소는 소보다 잘생겻고 엉덩이에 기름도 적다."고 말했다. 「보즈먼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스콧 맥밀리언 기자는 이것이 "좀 실례되는"발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터너가 정중하고 생각이 깊기 때문에 "남부의 대변인"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터너 자신도 수줍어하면서 자신의 몇가지 결점을 시인한다. "한때 나는 모든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했었소. 나는 자주 실언을 해요. 머리보다 말이 앞서나가면 실수하게 마련이지요."

예컨대, 1981년에 레이건 대통령이 이동식 탄두미사일을 개발할 계획을 세웠을 때, 터너는 흑인 실업자들로 하여금 "피라미드을 짓는 이집트인들처럼" 미사일을 밧줄에 매어 전국으로 끌고 다니도록 하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9년 연설에서 그는 "동성연애자들에게 일어난 한 가지 좋은 일은 그들이 변소에서 나와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이제는 누가 호모이고 누가 아닌지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1979년에 요트경기 사상 최악의 참사로 18명이 목숨을 잃은 후 터너는 "그런 폭풍이 불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우리가 모두 스페인어를 하게 될 뻔했다"고 말했다. 폭풍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었던 일을 빗대어 한 말이었다. 터너는 이런 발언을 하고 나서는 꼭 사과를 했다.

독불장군인 테드 터너는 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를 즐겼다. 그것은 그가 "체제"라고 인식하는 것들-아버지, 군사학교, 교사, 뉴잉글랜드 지방의 요트계, 기저회견장의 기자들-을 괴롭히는 방법이었다.

그가 전략상 경멸하는 말을 사용하는 듯한 경우도 있다-언론재벌 루퍼트 머독과의 공개적인 반목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95년에 폭스 네트워크 대표인 머독은 CNN에 맞설 새로운 24시간 뉴스 채널을 만들 의도를 밝히면서 "이제는 CNN이 도전받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방송이 갈수록 좌경화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터너는 이 말에 정말로 화가 났다. 그는 즉시 공개적으로 자기가 "머독을 벌레처럼 으깨버리려고 한다"고 응수했다. 터너는 머독을 선적 목적으로 언론을 장악하고자 했던 독일 독재자 "고(故) 아돌프 히틀러 총통"에 비유하기 시작했다.

머독은 처음에는 이런 공격을 묵살했다. 그는 이것이 터너의 경쟁 스타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반목은 머독에 따르면 타임워너사가 자신의 24시간 뉴스채널을 내보내 주겠다던 약속을 어기자 1996년에 본격적인 사업상의 싸움으로 발전했다.

머독은 터너를 고소했을 뿐 아니라 그의 기함(旗艦)인 「뉴욕 포스트」지를 통해 뱅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이 신문은 터너가 조울증에 걸렸다는 어느 의사의 진단서를 인용하면서 "터너는 미쳤는가?"라는 표제 기사를 싳고 구속복(정신병자, 흉폭한 죄수에게 입히는 옷=편집자주)을 입은 터너의 만화를 실었다. 터너는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그를 죽일 생각이었다. 그가 자기 신문에서 내가 미쳤다고 했으니까 내가 그를 쏴 죽이더라도 형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어 터너는 머독에게 문자 그대로 싸움을 걸어 도전을 한 단계 높였다. 터너는 AP통신에 "나는 그에게 권투시합을 갖자고 도전했다."고 발표했다. "58세난 사람(터너)과 66세의 대결이다. 요금은 시청자 당 4달러 95센트, 수익금은 승자의 자선기금에 입금하기로 한다."

터너는 아주 진지했다. 그는 네바다주 체육위원회의 승인 절차를 밟기 시작했고 HBO에도 중계 일정을 잡아 놓았다. 머독은 응답하지 않았다. (타임워너사는 머독을 맞고소했고 양측은 나중에 화해했다.)

이런 감정폭발은 계산된 행동인 경우도 있겠지만 꾸며낸 연기는 아니다. 제인 폰다는 자기가 넘치는 에너지로 불꽃이 튀는 남자와 사는 법을 매웠다고 하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좋든싫든간에-그의 한가지 매력이기도 하지만-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의 속마음이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이해하면 돼요."



난폭한 선장

테드 터너는 지금도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의견을 갖고 있으며 이를 남에게 알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연설은-주로 통렬한 비난이다-뒤죽박죽이면서도 열정적인 것이 특징이다.

악명높은 사례로 1990년 미국 휴머니스트협회 회의에서 행한 연설을 들 수 있다. 이때 그는 "기독교는 패배자들의 종교이다."라고 말했다. 이 인용구를 사용한데 대해 뒤에 사과하기는 했지만 그는 지금도 이 말에 담긴 메시지를 믿고 있다. 이 말의 속뜻은 "기독교는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내주고 예수를 따르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영락한 사람들의 종교"라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폭언을 퍼붓는다. "지옥에서 영원히 불에 탄다고? 바람을 좀 피웠다고 해서? 하니면 맥주를 두어 잔 마셨다고 해서 ?"

"종교를 한 가지 받아들여야 한다면 나는 인간의 천성은 선량하고 대자연은 신이며 그래서 우리 모두 즐거운 사냥터로 간다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생각이 마음에 든다."

터너는 종교가 인루에게 해악을 끼친 것보다 선을 행한 것이 많다는 점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자기가 영웅으로 존경하는 마틴루터 킹과 간디가 종교에서 힘을 얻었다는 일반의 생각도 배격한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난 카톨릭이건, 개신교이건, 자본주의건, 공산주의건 도대체 '이즘'이라면 신물이 나. 모두가 자기 이즘이 남의 이즘보다 낫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이즘은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는 휴머니즘뿐이야."

당연히 터너는 독자적인 신앙체계를 갖고 있는데, 그는 이를 10가지 "자발적 정신"으로 정리하여 모두가 따르도록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십계명에 수정절차가 없었다는 데" 실망하여 만든 것이다. 그는 십계명 중 일부는 "시대에 뒤졌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1989년에 십계명을 고쳐쓴 것이다.

그는 이 지침을 베껴서 지갑에 넣고 다닌다. 이 지침은 "지구라는 행성과 그곳에 사는 모든 생명체, 특히 나와 같은 종에 속하는 인류를 사랑하고 존중하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의 세 번째 계명은 "둘 또는 국가가 권장하는 수 이상의 자녀을 갖지 않기로 약속하라"는 것인데, 나중에 이 계명은 한 자녀만 낳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열번째 계명은 신이나 국가에 대한 성실이 아니라 "유엔과 지구의 상태를 집단적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우엔의 노력"에 대한 성실을 서약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터너 계명"이라고 부른다.

그는 요즈음 그의 또 한 가지 지구적 관심사인 인구과잉 문제에 대해 열심히 발언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작년 10월 미국 잡지협회에서 행한 그의 두서없고 종잡을 수 없는 발언이다. 그는 인류에게 식량과 주거공간이 부족해진 황량한 미래 세계를 내다보았다.

그는 인류는 계획을 잘 세워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서투른 진화과정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힘든 과제라고 역설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우리는 지능를 2% 정도 더 갖고 털이 조금 덜난 침팬지에 불과한데도 지금 전에 다루어보지 못한 문제를 다루도록 요청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만일 사태를 개선하지 않으면 온 세상의 군중이 떼를 지어 이곳에 몰려와 "이 나라 인구는 지금보다 다섯배로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것은 완전히 지옥일겁니다. 뉴욕 인구가 1억이라고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은 지금도 맨해튼에 가면 목이 뻣뻣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그는 그런 결과가 오면 인과응보라고 말한다.."우리가 세계의 지도자인데도 세계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탓"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자기 나라와 동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요즈음 터너의 단골 메뉴이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낭비가 심한 물질주의적인 나라입니다. 우리는 대형 요트와 3대의 승용차, 2채의 주택을 갖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작은 나라들을 못살게 굽니다."

"미국은 특려먹었다"는 식의 이런 테마야말로 "과격한 민족주의자에서 과격한 국제주의자로" 변신한 터너으ㅢ 가장 골치 아픈 즉면이다. 냉소자들은 그것이 깊은 신념에서라기보다 이윤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꼰다. 이같은 심경변화는 그가 CNN을 미국 중심이 아닌 "국제적"인 뉴스로 전세계에 판매하기 시작한 1980년 대초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국제적인 뉴스임을 강조하기 위해 터너는 CNN 방송에서 "외국"이란 단어의 사용을 금하고 방송중에 이를 어기는 해설자나 방송원에게는 100달러의 벌금을 물렸다. 걸프전중에 터너는 이라크를 "적"이라 부르기를 거부했고, 또한 CNN은 피터 아넷 기자를 바그다드에 남겨두어 사담 후세인의 관점을 반영하는 검열받은 기사를 방송하게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여러 나라 대표들이 참석한 1996년의 CNN "세계 보도" 회의에서 터너는 "미국에는 세계에서 가장 멍청한 몇몇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수치스러운 노릇이다."라고 일갈했다.

세계 시민

그이 미국 비난은 그가 다른 약탈적인 정부들을 옹호하지만 않았더라도 더 그럴듯했을 것이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쿠바, 구소련, 중국 등 전체주의 국가들에 대해 심하게 아첨하는 말을 해왓다.

터너는 1982년에 처음으로 피델 카스트로를 방문하고 돌아와서 이 공산 지도자를 '훌륭한 친구"라고 불렀다. CNN 기자들이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 아니냐고 비판하자, 그는 불쑥 "카스트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오, 나처럼 독재자일 뿐이지" 하고 대답했다. 카스트로는 또한 친절한 독재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가 친절하게도 CNN을 위한 판촉광고 촬영에 응해주었던 것이다.

터너는 1990년에 세 번째로 쿠바에 다녀온 후에도 여전히 카스트로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는 CNN의 "크로스파이어"에 출연하여 쿠바인들이 "우리가 가는 곳마다 (카스트로에게)환호했다"고 말했다. 작년에 CNN이 근 40년 만에 아바나에 진출한 첫 미국 보도기관이 된 것은 우연히 아니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정의하자 이에 실망한 터너는 이해 증진을 위한 미-소 친선 경기대회를 개최했다. 그는 또한 당시의 최고 공산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지지하는 열렬한 치어리더 역할을 했다. 예를 들면 1990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아마도 역사상 그 어느 개인보다도 움직임이 빠른 사람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빠르다. 미국은 언제나 6개월은 뒤처져 있다."

터너는 중화임민공화국의 공산정권을 지지하기까지 했다. 천안문 학살사건 일 년 후에 터너는 북경의 외신기자협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해서 기자들을 아연케했다. "우리는 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한 조치를 취해야만 했던 정부와 군인들을 생각해도 가슴이 아픕니다."

기자들은 입이 딱 벌어졌고 어는 기자가 해명을 요구하자 터너는 내친 김에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이 사태를 좀더 잘 파악했어야 하는 거 아니오? 학생들은 이미 경고를 받았었어요."터느는 나중에 중국의 어느 학생 지도자에게 사과했지만, 그래도 자기는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최근에 이 모든 일에서 발뺌할 기회가 주어지자 그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이렇게 해명했다. "나는 중국인들과 사이좋게 지내야만 합니다. 오늘날 모두가 다 민주체제에서 사는 건 아니니까요."

마지막으로 그는 유엔에 대해 그의 변함없는 열의를 보이고 있다. 그는 작년에 유엔에 10억 달러의 기부금을 내겠다고 신청함으로써 이런 열의를 극적으로 나타냈다. 그것은 단일 기부금으로는 지금까지 어는 단체가 받은 것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터너에게 이 생각이 떠오른 것은 그가 유엔협회가 수여하는 상을 받으러 뉴욕으로 가는 길에 비행기 안에서 자신의 개인 재무제표를 훑어보고 있던 중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1996년 12월 보고서에 따르면 그가 소유한 타임워너 주식의 가치가 22억 달러라고 되어 있었다. 그는 1997년 8월 보고서를 들쳐 보았다. 주식 가액이 10억 달러 늘어 있었다. 그때 9개월 분의 소득쯤 유엔에 줘버리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가 그날 저녁 식탁에서 아내 제인에게 이 말을 했을 때 제인은 그의 통 큰 마음씨에 너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다음날 그가 수상식에 참석하여 10억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발표하자 참석자들은 벌떡 일어나서 박수갈채를 모냈다.

터너는 이 돈을 인도주의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도록 조건을 붙이는 한편, 그의 마음에 드는 진보적 인사로서 상원의원을 지낸 팀 워스(민주당, 톨로라도주)를 고용하여 이 돈을 비영리단체를 통해 관리하도록 했다. 이 돈을 타임 워너 주식으로 10년에 걸쳐 매년 1억 달러씩 지급하기로 되어 있다.

이 일은 그가 종종 "심술쟁이 구두쇠"라고 부르는 부자들에게 자선기부금을 늘려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최근의 그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 이제는 부자들이 과거의 자기처럼 부(富)를 자본주의 게임에서 득점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포브스」지 선정 400대 기업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 경쟁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기를 그만둘때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누구나 살아가는 데 2억달러 이상은 필요없다고 말한다. "가령 5000만 달러를 들여 큰 집을 한 채 산다고 합시다. 그리고 (2500만 달러를 들여) 해변과 산 속에 집을 몇 채 장만하고, 2500만 달러를 더 들여 제트기를 한 대 산다고 합시다. 1억 달러만 더 있으면 이 모든 것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원금 1억 달러에 10% 이자면 1년에 1000만 달러가 나오니까요, 그러니까 누구라도 2억 달러 이상은 필요없다는겁니다." 남는 돈이있으면 기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터너는 그의 말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그는 19991년에 설립한 터너재단을 통해 매년 5500만 달러를 수천 가지 프로젝트에 지출하고 있다.

무엇이 이같은 박애정신의 물결을 불러 일으켰을까? 테드 터너는 자기 아버지가 자살한 한 가지 원인은 목표가 너무 좁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아버지 에드 터너는 자신의 세 가지 꿈-백만장자가 되는 것, 요트와 농장을 소유하는 것-을 실현하는 순간 미래를 상실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테드 터너는 자기가 삶에 열중하기 위해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세울 필요가 잇었다고 자식들에게 털어놓았다. 바로 이 때문에 그가 세계평화와 같은 이루기 거의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해 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목표를 필요로 한다.

갈수록 철학적, 자기 반성적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이 사업가, 요트맨, 환경운동가, 농장주 겸 자선가에게 그의 지난 업적을 돌이켜볼 때 묘비에 무어라고 적기를 바라느냐고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업적, 어떤 애도사를 적기를 바라느냐고.

터너는 이렇게 말한다. "10년 전 「프라우다」지에서 온 사람도 그런 질문을 했었소. 나는 모스크바의 호텔방에 있었는데 그때 방문에 걸린 팻말이 눈에 뜁디다. 나는 묘비에 이렇게 적었으면 한다고 대답했지요-'깨우지 마시오.'

"지금 생각해보니 이게 더 좋을 것 같아요.-'더 할 말이 없다.'"


1998년 10월호 -리더스 다이제스트

값 2,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