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EC 소식지

에니어그램과 명상

HOME - KEEC 소식지 - 에니어그램과 명상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KEEC) 글쓴이 : KEEC   2012-08-27 13:40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각성 인텐시브 Who Is In?

각성 인텐시브 Who is in은 전통적인 선(禪)의 명상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나는 진정 누구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모든 에너지를 모으고자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습관적으로 쓰고 다니는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본래면목을 향해 바로 뛰어들 수 있게 된다.

극히 현대화된 공안인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계속해서 묻고 또 물으면서 그리고 매순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또 하면서, 여태까지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인성’과의 동일시가 확장되기 시작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혹은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등.

우리가 여태까지 걸치고 다녔던 모든 동일시를 버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내가 얼마나 인성과의 동일시를 하고 있는가’를 먼저 체험하고 이해하는 것뿐이다.
체험과 이해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동일시를 버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동일시가 사라진 그 순간, 우리는 존재의 중심을 향해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옮겨놓을 수 있다.

즉 우리가 여태까지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해왔던 모든 층을 섭렵하게 되면, '지켜봄’ 즉 관조의 가장 깊은 중심에 바로 도착하게 된다. 24시간내내 깨어있는 자(者)로서, 깨어있는 의식으로 지켜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지금, 바로 이 순간 안에서 깊은 이완을 누릴 수
있다. 더블어 진정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 수 있다. 찬란하게 빛나는 존재의 기쁨에 둘러싸인 채.

이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침묵해야 하며 항상 홀로있도록 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 People (양재오) 글쓴이 : KEEC   2012-08-27 13:39

세상 사람들 People


하느님 곁에서 아주 깊은 명상(contemplation,靜觀)에 잠긴 또 다른 존재는 사람(人格,person)입니다. 사람은 천사보다 좀 못하지만, 창조의 관을 쓴 하느님의 모상(형상,the image of God)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당신은 그토록 마음 쓰시옵니까? 모든 사람은 영원으로부터 감추어진 신비이옵니다. 오, 지극히 거룩한 성사여 ... 모든 찬미와 감사를 매순간 당신께 드리나이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요, 계시이며, 거룩한 변모이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당신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사람은 온 세상에서 지극히 아름답고 놀라운 피조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용모, 미소, 눈, 떨림, 보행, 음성 등, 몇 인치되지 않는 그 각각의 용모는 놀라운 다양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각 사람의 얼굴은 세상의 또 다른 창문입니다. 그것은 투명하거나 불투명하고, 밝거나 어둡습니다. 각 사람의 얼굴은 새로운 세상입니다. 내 세계를 확대하거나 축소시키는 새로운 모험입니다. 그러나 내가 수많은 얼굴과 함께 살아가고, 수많은 시선과 부딪히고, 수많은 귀에서 귀로 듣고 살아가면서, 정작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대하고 사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눈길은 재빠릅니다. 그것은 한번 힐끗거리며 수많은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귀는 느리고, 배타적입니다. 나는 한번에 다만 한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 개개인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인사하고, 그들을 환영하고, 안부를 묻고, 작별인사를 하면서, 사람들의 혼잡스러움을 의식합니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게 되는 사람은 점점 더 적어집니다. 우리의 생활공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익명(匿名)으로 존재합니까? 그들 개개인이 내 가족의 일원으로 있을 때조차, 모두가 어쩐지 낯선 사람들입니다. 각 사람은 낯선 땅에 있는 낯선 사람이죠. 나는 사람들이 붐비는 해변, 분주한 공항에서 익명을 체험합니다. 누구의 이름도 모르고,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르는 익명의 압력이 크게 다가옵니다. 그들에게 내가 머물도록 마련된 공간은 거의 없습니다. 나는 갈수록 더욱 모르고, 또 나는 갈수록 더욱 잊혀집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한편으로 그들이 사랑스럽고, 얼마간의 스쳐 지나가는 만남과 기도와 미소로 축복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스쳐 지나거나 만난 사람들은 나로부터 축복을 받고, 나에게 축복을 선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그토록 절절히 깊이 사랑하고, 군중에게 가르치고, 빵으로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지만, 그들 삶의 언저리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예수의 마음의 고통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는 무명(無名)의 민초(民草)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한 평생 우리가 이름을 알고 지내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마음 속 내밀한 속사정까지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우리는 모두 사람들의 겉만 보고 사는 사람들(people-watchers)입니다. 한 눈에 그저 힐끗 군중(群衆)을 바라봅니다. 우리 한 생애 각별한 관계를 지니고 개별적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으며, 통상 우리는 운동장, 극장, 쇼핑센터 같은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 속을 스치며 지나거나 특별한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그냥 바라보고 지나칩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각 사람은 하느님의 선물이요, 기쁨이며, 은총이요, 그 분의 현존(現存,presence)인 성사(聖事,sacrament)입니다. 각 사람은 그 분의 메시지(傳言)요, 그 분의 일을 하는 매개(媒介)요, 그 분의 초대(招待)입니다. 우리는 모두 신비체(神秘體, the Mystical Body)로서, 성인들의 친교(親交, communion)인가 하면, 죄인들의 통교(通交,communion)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류와 그 인류가 빚어온 역사(歷史)에 빚을 지고 있으니, 예컨대, 내 집을 비롯해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각종 건축물을 비롯하여 내가 입고 있는 옷이며, 내가 먹는 음식, 내가 사용하는 가구들과 내가 타는 자동차와 여행을 위해서 뚫린 각종 도로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손길과 수고로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과 도시를 건설하는 모든 사람들과 물과 기름과 전기와 전화 통신을 비롯한 통신 시스템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위치에서 성실히 수행하는 일과 봉사에는 이처럼 서로 긴밀하고 깊은 내적 연관성(內的聯關性,interconnectedness)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매일 이루어지는 감사(感謝,thanksgiving) 행위입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우리가 한번도 만나지 못하고, 한 번도 그들을 방문할 일이 없음에도 우리가 아는 신문과 방송, 영화와 텔레비전 같은 모든 매체의 종사자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났지만 그 이름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눈길을 보냈지만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사를 갔거나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떠도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죽음으로 우리 삶의 공간으로부터 사라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길게 느껴지고, 때로는 급류를 탄 듯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 삶의 공간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는가 하면,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의 마음으로 뿌듯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 좋은 일을 하거나, 우리가 누구의 은인(恩人)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뭔가를 할 때, 형언(形言)할 수 없는 하나 됨(一致, communion)과 완전한 일체(一體, wholeness)가 되었음을 체험합니다.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각별한 방법으로 그 이름을 부릅니다. 그들은 나를 부르고, 나를 바라보고, 나를 비추어 주고, 내 말을 듣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불렸던 적이 없는 이름, 각 사람의 이름을 고유하게 부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알려지지 않은 개별적 자아인데, 서로 만들어 가고, 서로 다가가고, 서로 협력하고, 서로 칭찬하고 고무(鼓舞)합니다. 서로 칭찬하고 고무하는 표현을 통하여 공동체(共同體,community)를 만들어 갑니다. 하느님이 가장 반기시는 기도는 서로를 칭찬하고 고무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칭찬(稱讚)하고 고무(鼓舞)하며, 서로 봉사(奉事,serve)하는 기예(技藝, 藝術, art)를 배양(培養)하고 계발(啓發)하게 하십시오. 그들이 자유롭고 진실하게 서로서로 그들의 존엄(尊嚴,esteem)과 그들의 감사(感謝,gratitude)와 그들의 존경(尊敬,respect)을 표현(表現)하게 하십시오. 서로 억압(抑壓)하거나 제압(制壓)하려 하지 마십시오. 특히, 연약한 사람들을 내리 누르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가장 위대한 은사(恩賜,charism)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만이 다른 사람들 안에서 진실(眞實,the truth)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이 은총(恩寵,grace)을 드러내기(啓示)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그 어떤 기예(技藝,art)도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는 사업(事業,work)이 아니며,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맺어진 우정(友情,human friendship)이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存在,being)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힘입니다. 사랑은 문화, 교육, 재능, 기술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 인간의 마음(human heart)에 달려있습니다. 각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그들의 독특한 사랑, 그들만의 독특한 삶을 나누는 방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그들의 진실과 비밀과 소원(所願)을 가지고 기도를 합니다.

우리는 거듭 반복해서 서로를 찬양하고 축복해주는 법을 배우고 있으며, 우리 자신을 칭찬하고 축복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방법을 모르면, 사람들이 여러 경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그 법을 보여줍니다. 나날(每日)이 태어나는 날(生日,birthday)입니다. “내가 너에 대하여 좋아하는 것은 ...” 은 각 사람이 지녀야 할 가치 있는 태도입니다. 가장 진실한 축복(祝福)은 서로의 눈을 통해서 상대를 보고, 서로 안에서 미감(美感,the beautiful sensitivity)을 발견(發見)하고, 서로가 지니고 있는 은총(恩寵,grace)을 더 많이 발견하는 것입니다. 탁월(卓越)한 덕목(德目,virtues) 가운데 하나는 찬탄(讚嘆)하고 칭찬(稱讚,admiration)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대로 칭찬하지 못하고, 우리 자신을 충분히 신뢰하지 않습니다. 형제와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고, 함께 모여 즐거움을 나누고, 드러나지 않은 봉사의 은사(charism)를 함께 나눌 때,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는지 모릅니다. 나를 완전히 제대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각 사람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지만, 그것은 내 눈에 들어오는 무지개 빛깔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그 무지개를 발견하는 것은 전체 공동체의 몫입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많은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또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나름대로 다른 사람의 독특하고 그 사람의 본래 모습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고유하고 내밀(內密)한 통찰(通察,insight)하는 힘을 가지기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찬양하고 축복하는 것을 즐기는 다소 쑥스러운 순간들(more embarrassing moments)을 필요로 합니다. 서로를 알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이 내 자신을 알도록 하는 데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 할까요.

+이 글의 출처 Celtic Meditations by Edward J. Farrell, pp. 72-77 / 2005.3.16 / 번역 양재오

신성이라는 이름의 사랑 ♡ (KEEC) 글쓴이 : KEEC   2012-08-27 13:39

신성이라는 이름의 사랑 ♡

우리가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은 서로에 대한 끌림입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끌림은 서로에 대한 밀어냄을 동반합니다.
끌림과 밀어냄의 메커니즘을 이해 하는 데는 지구의 이원성과
양극성을 이해 해야 합니다.

흔히, “필링이 왔다.” “ 강렬한 끌림이 왔다” 그래서
“사랑에 빠졌다” 라고 합니다.
이런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엄청난 착각입니다.

사랑은 불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하는 전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어느날 갑자기 생겼다가 그 다음 날 갑자기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그럼,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이란 어떤 생각이나 행동에 국한 되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자신을 통하여 자신의 주변에 일어나도록 허용된
에너지 입니다.

사람의 원래의 본성은 신성한 사랑 입니다.
하나의 육신이 다른 육신을 보살피는 것을 사랑으로 생각 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이란 그렇게 제한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근원적으로 부여 받은 본연의 자질 입니다.
사랑으로부터 모든 존재는 창조 됩니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사랑할 때가 있으면 사랑이 식을 때도 있다고
얘기하는 것은 잘못 입니다. 이렇게 왔다가 사라지는 사랑은 자신의
에고에 근거를 둔 감정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다는 느낌을 가진 사랑을 하다가도, 자신에게 무엇인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사랑이 식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서로 기대감 속에 매달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영원한 사랑은 생겨났다가 상황에 따라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변함없이 늘 있는 것,
알아보기 쉬운 것,
숨기지 않는 것,
간단한 것,
서로 믿는 것,
어린아이같이 순수한것,
모든것을 아는 통찰력,
이런 것이 바로 참사랑 입니다.

사랑은 처음부터 완전한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들도 신성이라는 사랑을 알때,
그때 비로소 완성, 자아실현(수퍼에고)의 고지에 다다른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으로 빛나십시요.* 진주 총총..